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.......엄마께서 풋고추를 따서 반찬을 만들어주시던 고추가 익었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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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.......엄마께서 풋고추를 따서 반찬을 만들어주시던 고추가 익었다

비밀의 꽃밭 2019. 12. 17. 19:33

< 제 어릴 적 고향은 우리나라 대표적 고추생산지였어요. 자랄 때 늘 보던 고추밭, 엄마께서 밀가루 입혀쪄서 양념무쳐 주시던 일들이 그리워서 아파트 베란다에 키워 보았어요>

내일은 탈상
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.

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
바람이 내려와
어린 모를 흔들때

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
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
아랫도리 서로 묶으며
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.

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.

남녘땅 고추밭
햇빛에 몸을 말릴 적

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
붉은 고추가 익는다 10
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
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
아랫도리 서로 묶으며
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.

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

-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/허수경-

*허수경 시인(1964 ~2018.10. 3)
1964년에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독일 뮌스터대학교 고대근동고고학 박사. 1987년 시인으로 등단하고 1992년 진주를 떠나 독일에 살다가 2018년 위암으로 타계. 당시 진주를 떠날 때 이렇게 먼 나라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. 진주가 그리울 때면 독일에서도 밥을 한 상 차려놓고 열심히 먹는다. 1987년 『실천문학』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. 시집으로 『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』『혼자 가는 먼 집』『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』『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』『빌어먹을, 차가운 심장』이 있고, 산문집으로 『길모퉁이의 중국식당』『모래도시를 찾아서』『너 없이 걸었다』 등이 있다.

내 어릴 적 고향의 초여름,
엄마께서는 밥을 지으면서 얼른 텃밭에 가셨다.
푸른 고추밭에 벌써 손가락만한 풋고추가 굵어지고...
한 바가지 따와서 씻은 풋고추에 밀가루를 입혀 밥이 뜸드는 무쇠솥 뚜껑을 열고
밥 위에 얹어서 찌고 꺼내었다.
그 쪄진 것을 참기름 양념장에 버물린 풋고추 양념반찬을 뚝딱 내 놓으셨다.
그 찐풋고추 반찬은 따끈한 밥과 먹으면 얼마나 맛나던지...

지금 고추는 그런 맛난 토종고추가 사라지고 없다.
한국인의 고추사랑은 매운 풋고추를 또 매운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고 놀라워하지만,
배고풀 때 찬 밥을 물을 말아서 반찬은 한 가지,
풍미 가득나는 토종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어면 밥 한그릇도 해치운다.
그렇게 맛난 것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.

오늘 아침엔 김장김치가 이제 맛이 잘 들어서 먹다가,
엄마께서 해 주시던 그 찐풋고추 참기름양념 반찬이 떠오른다.
그렇게 맛나게 해주시던 엄마께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지금 안 계신다.
슬픔만이 내마음에 차오른다.